미스 레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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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04 Vault Sleepbox (언제 쓴거지?)
미스 레이온

그 날은 추웠다. 살을 에이는 바람이 거리를 가른다. 루스는 빨갛게 일어난 자신의 두 손을 본다. 와인색 스웨터, 베이지색 코트에 갈색 머플러를 둘러, 멋은 있었지만 추위를 막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됐다.
“으으… 춥다!”
읏추, 읏추 하고 혼잣말을 하며 루스는 재빠르게 건물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의는 짧은 스커트와 얇은 스타킹만 신고 있었기에 냉기가 그대로 타고 올라왔다. 게다가 단화 신은 발은 어찌나 시려운지!
두 손을 모아 따뜻한 숨을 불며 비벼대던 루스는 방풍실 안으로 더 들어선다. 미스 레이온 백화점이다. 마침 연 초라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아직도 캐롤이 울려퍼진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언젠데. 그 풍광에 냉소를 보인 루스는 곧이어 커다란 트리를 본다.
전나무와 흡사한 크리스마스 트리. 그리고 그 앞에는 오손도손 세 가족. 꼬마는 제법 어렸다. 서너살 쯤 되었을까? 아직 전뇌 수술도 받지 못하는, 세상 물정 아무 것도 모르는 꼬마. 그 꼬마는 작은 발로 아장아장 걸었다. 그러다 넘어진다. 인파에 치일까 싶어 황급히 달려와 엄마는 손을 붙잡는다. 그러나 꼬마를 탓하지는 않는다. 엄마는 상냥하게 눈을 마주치고 일으켜세운다. 꼬마는 울지도 않고 이번에는 얌전히 아빠에게로 간다. 마찬가지로 아장아장 걸어서.
‘나도 저런 때가 있었을까.’
루스는 문득 생각한다. 그 목가적인 풍경이 어떤 식으로든 감성을 자극했을까. 루스는 가끔 요통이나 근육통에 시달리기도 하고, 가끔은 사람을 해치고 싶다. 그러니 자신은 사람일테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걸…’
한숨을 내쉬며 그는 고개를 푹 숙인다. 팔짱을 낀 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있어도 도무지 감이 오지 않는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커녕 소년기도 전혀. 심지어 20대 초반의 경험도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지금의 자신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나는 뭘 위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즈음, 루스는 저 어귀 가게에서 엉거주춤하게 빵을 사고 있는 멀대를 발견했다.
“야, 씨발놈아!”
루스는 달려가서 브라이언의 머리를 한대 팍 쳤다. 산발 머리칼을 만지자 손바닥에 기름이 조금 묻어나와 루스는 잠깐 표정을 찡그렸다.
“아, 왜!”
공연히 얻어맞아 기분이 상한 브라이언은 새된 소리로 싫은 티를 냈다.
“거기 멀거니 서있는 꼴이 보기 초라해서 한대 쳤다, 왜.”
루스는 왠지 그 모습이 웃겨서 배시시 웃었다.
“나 참…”
브라이언은 무어라 항변하려다 포기하고, 그냥 피식 웃었다. 그리고 루스의 손을 잡는다.
“누가 손 잡으래? 이거 놔, 노숙자 새끼야.”
루스는 코먹은 목소리로 앵앵거렸다.
“예이, 예이.”
브라이언은 그럴 수록 더욱 손에 힘을 준다. 주었다가 다시 푼다. 잡은 손을 약간은 간질여본다. 거칠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루스의 작은 손을 희롱한다.
“간지러.”
괜히 표정을 굳힌 루스는 이내 말이 없어졌다.
둘은 복도를 걷는다. 이내 넓고 층고가 높은 중앙 홀이 나왔다. 몰딩과 은은한 간접조명을 지나면 그 위로 따스한 햇살을 받는, 양감 있는 하얀 도장 벽체가 곡면을 그리며 주욱 올라서있다. 담쟁이 덩쿨이 줄기를 뻗은 벽체 위로, 유리 난간이 이어진 각 층을 보다 보면 그 끝엔 채광창. 아직 한낮의 광선을 밝게, 그리고 선명하게 내리쬔다. 루스는 조각 구름이 둥실 떠가는 모습을 보고 상념에 젖는다.
“있잖아, 너는 어린 시절, 기억해?”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루스 쪽이었다. 어느새 한 손에는 바닐라 콘 아이스크림이 들려있었다.
“음… 뭐, 그렇지. 좋은 것도, 싫은 것도…”
“꽤 선명하게.”
무던하게 말하던 브라이언은 왠지 우수에 찬 눈빛이다. 그의 쌍꺼풀이 어느새 짙어졌다.
“아주 어릴때도?”
“뭐, 갓 태어났을 때 빼고는.”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브라이언을 루스는 의심의 눈초리로 본다.
“거짓말. 네가 그렇게 머리가 좋아?”
“응.”
“그래서 슬퍼.”
벤치에 앉아 대화하던 둘. 브라이언은 주머니에 집어넣은 손을 조용히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렸다.
루스는 괜히 심통이 나서 브라이언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툭툭 친다.
“이 새끼야, 내가 말 했어 안 했어?”
“우울한 거 금지라고 했지?”
그러더니 그의 입가에 콘 아이스크림을 살짝 묻혔다.
“…”
“이거 좀 닦아줄래?”
브라이언은 조용히 있다가 나즈막히 말한다.
“나 휴지 없는데?”
루스의 말에 브라이언은 손으로 대충 닦으려 했다. 그러나 제지당한다.
“아, 아. 안돼. 이건 벌이야. 다 녹을 때까지 내비 둬.”
“그러지 말고, 닦아주라.”
“휴지 없다니까?”
“알잖아.”
브라이언은 돌연 루스를 또렷히 응시했다. 응시한 채로 잠시 멈춰있다.
그리고 입술이 건조한 것 마냥, 괜시리 입술에 침을 발랐다.
“알긴 뭘 알아. 헛 수작 부리지 마, 이 자식아.”
잠시 멈춰있더니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루스는 먼저 자리를 떴다.
“야아, 같이 좀 가자.”
브라이언은 그 뒤를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