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제는 엄마 편

2025-03-19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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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제는 엄마 편

루스의 부모님 이야기

물론 제목은 가제 (괄호치고 = 말장난임)


루스는 담벼락에 기대어 담배를 꼬나문다. 고개를 기울여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일 때, 그 옆으로 한 남자가 걸어왔다.
"켈록, 켈록. 아, 제발 좀. 그만 피우면 안 되냐?"
남자는 새된 목소리로 불평한다. 루스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크다. 하지만 엉거주춤하게 서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
"뭐래. 네가 내 부모냐?"

루스는 길게 한 모금을 더 빨고 꽁초를 탁탁 털어 튕겨내버린다.
"그래서, 어떻든?"
흘겨보듯 올려보며 묻는 루스의 질문에 남자는 답한다.

"글쎄다. 크롬 적응성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던데, 모르겠어."
바지 밑단을 살짝 접어 올리더니, 광택나는 금속제 다리를 한번 어루만진다.
"'브라이언 씨, 조금만 더 지켜봅시다.' 라대. 좋은거는 더 안 주고."

루스는 브라이언을 공연히 밀치더니 퉁명스레 말한다.
"됐거든. 펜타닐은 이제 끝이야."
"약쟁이 새끼가 기껏 재활 끝내놓고서... 다시 다 망칠 생각이야?"

브라이언은 입을 비쭉 내밀면서 점퍼의 어깨부분을 털었다.
"흥, 그러는 너는 내 엑스처럼 말하네."

피식 웃는 루스는 차 운전석에 타면서 받아쳤다.
"약쟁이 노숙자 새끼한테 부인이 있는 줄은 또 몰랐네."
"한번도 간 적 없어. 사귀기만 했지."
"병신. 누가 궁금하대?"

브라이언은 조수석에 타면서 불평한다.
"자기가 말해놓고선... 에휴, 됐다."

검은 73년식 말리부. 시동을 걸자 이쪽에서도 한숨이 나왔다. 입김 대신 검은 연기를 뿜으며 털털거리고는.

주차요원은 주차권을 홱 낚아채고는 말도 없이 차단기를 열었다.
"...그러니까 말이지, 소피아는 왜 멀쩡한거야? 걔는 따로 약도 안 먹는데. 너보다 더 많이 개조했으면서. 크롬 적응성도 개인차인가?"
브라이언은 뭔가 말하려 했지만, 입을 떼기도 전에 루스의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이거 실례."

루스는 전화를 열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요즘 세상에 폴더폰이라니.
"전화받았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호들갑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우리 아기 루스. 잘 지내니? 왜 연락도 없어, 그래? 밥은 잘 먹고? 또 선머슴처럼 싸움박질 하고 다니는 건 아니지? 요즘 어떻게 살아?"
루스는 오만상을 찌푸렸다. 브라이언은 냉담하게 고개를 돌리며 입가를 비튼다.

"엄마."
외마디 대답에 돌아오는 것은 속사포같은 말의 비였다.
"글쎄 들어봐. 요즘 경찰들도 많이 죽고 그러니까 너도 잘 지내는지 무탈한지 너무 걱정되잖니. 우리 아가도 비슷한거 하잖아. 탐정 나부랭이같은. 아, 미안하다 얘. 나도 모르게 나부랭이 이러네 호호. 네가 그런 데에 예민한건 알고 있어. 그래도 다 너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엄마 마음 잘 알지?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것도 옛말이잖니. 특히 우리같은 이민..."
"엄마!"

루스가 비명을 지르자,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숨 섞인 짜증이 돌아왔다.
"어휴, 얘가 또 왜 이런대. 엄마가 무슨 말만 하면 짜증이야. 너 요즘 만나는 남자는 있니? 잘 안되고 있어서 그러는거 아니야? 괜히 엄마한테 화풀이 하지 말고. 일도 쉬엄쉬엄 하고. 좀 꾸미고 다니고. 거렁뱅이처럼 하고 살면 엄마 마음 미어진다. 그거 엄마 얼굴에도 먹칠하는거야. 알아? 얘, 듣고 있니? 너도 나이가 있잖아. 슬슬 준비해야지. 요즘 애들이 어떤지 몰라서 그래. 어휴, 말도 마. 빨리 결정하고 빨리 정착해. 혼기 놓치면 평생 못 간다 얘."

"엄마, 나 운전중이야."
루스는 신경질적으로 엑셀을 밟아 앞차에 바짝 붙었다. 앞차가 정차하자, 루스도 따라 급정거한다. 대기하면서 핸들을 검지로 톡 톡 두드린다.
"어머, 그러니? 지금은 어디 가는 길이니? 그 고물차는 아직 몰고 다니나보구나, 소리 들어보니까. 얘가 무슨 취미는 영감탱이같아서. 그러니까 남자들이 싫어하지. 얘, 엄마말 잘 들어. 어른들 말로 엄마 말씀 틀린거 하나도 없다고 그랬어. 나중에 되면 후회할거다. '아, 그때 엄마 말 좀 들을 걸.' 이러고 말야."

말의 비가 쏟아질 때마다 루스는 더욱 입술을 깨문다.
"있잖니, 사실은 엄마가 다 준비를 해뒀는데. 내일 너희 집 근처로 갈거다. 애틀랜타에서 온다던데. 이름은..."
"아이 진짜 씨발!"
루스는 신경질적으로 급정거했다. 그와 함께 차체가 앞으로 기운다. 뭔가가 뒷좌석에서 날아다녔다.

그리고는 핸드폰을 탁 닫았다.

"벨트 하길 잘했네."
브라이언은 태연히 말했다. 긴장한 기색도 없이. 벌써 그의 상반신은 녹아흐르듯이 좌석 아래로 내려갔다.
경적 소리가 뒤이어 울리자 루스는 창문을 열어 뒤에다 대고 중지를 치켜세웠다.
"좆까 이 씹새끼들아! 아가리 여물어!"

브라이언은 폴라 티를 입까지 올리고는 공연히 중얼거렸다.
"왜 난 아직도 못 죽었지?"

아직도 씩씩 거리는 루스가 뒤에서 따라오는 운전자와 우격다짐을 하기 직전에, 브라이언의 전뇌는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화가 잔뜩 난 뒷차 운전자가 픽 쓰러진 것은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운전자의 목 뒷덜미에 있던 소켓, 그러니까 작은 구멍 세 개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었다.
루스가 운전석에서 내려, 시체처럼 몸을 뉘인 운전자에게 고함을 친다.
"왜, 당 떨어졌냐? 지 몸도 못 가누는 새끼가, 그냥 뒈져버리지 그래? 씨발 다들 내가 만만한가?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오늘 무슨 날이야?"

브라이언은 그런 루스를 보고, 조용히 일어나서 그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따귀를 한대 올려쳤다.
"정신 좀 차려."
'철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린다.

한 대 맞은 루스는 어리벙벙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도끼 눈을 뜨고 쏘아본다.
무언가 말하기도, 달겨들기도 전에, 무엇인가가 목을 죄여왔다.

"얌전히 있어."
우악스러운 오른손이 루스의 목을 조이자, 삽시간에 얼굴이 벌개졌다. 다리를 버둥거리자, 이번에는 차 보닛 위로 쳐박는다.
"이제 좀 정신이 드니?"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브라이언이지만, 어딘가 멀게만 들렸다.
눈물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어떻게든 손을 풀어보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숨이 거의 넘어가 의식이 흐려질 즈음, 결국 순순히 탭을 친다. 항복의 의사 표현이다.

"켁, 켁."
목을 붙잡고 괴로워한다. 무릎 꿇고 쓰러진 루스는 이내 보닛을 붙잡고 천천히 일어선다.
"씨발... 갑자기 머리에 피가 도네."
브라이언은 한번 흘겨보더니 무심히 말한다.
"그럴 수 있지."

고속도로 한복판. 차들이 겨울바람처럼 쌩 몰아친다.

한동안은 어느 누구도, 아무 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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