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yback DOJO

2023-02-18 0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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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s: dg, INDEX-창작

https://www.youtube.com/watch?v=1cBZcpSeiFc

전 여자친구의 "너는 또 다 잃고나서야 깨달을 셈이니?" 라는 말을 듣고 무언가 깨달은듯이 써내려갔던 초단편 소설.

Payback DOJO

그리고 지금 동수 씨에게 남은 것은 51장의 덱, 넝마같은 점프수트 한 벌, 그리고 털 뿐이었다. 후드도 있었지만, 굳이 쓰고 싶진 않았다. 그는 짐승을 싫어한다. 특히 원숭이는 더욱. 점프수트에는 검은 털이 있었다. 다리부터, 등까지. 후드에도 있었다. 동수 씨는 그 감각이 싫었다. 지금 느껴지는 이 감각이. 털이 살결을 부드럽게 간질였지만, 그런 식으로는 어루만져지고 싶지 않았다.

동수 씨는 티 파티를 생각했다. 티 파티에서 만난 마샤를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가 지금 여기 없다는 것도. 그 감각은 형언하기 어려웠다. 허전함인지? 혹은 답답함인지? 그것이 너무도 싫어서 그러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손에 쥔 덱이 꾸깃해졌다. 그리고 손에서 벗어난다. 하트의 퀸. 그것은 인파에 밟히고, 오물에 뒤덮힌다.

결국 동수 씨는 무언가 결심한다.

동수 씨는 일어나 거리를 다시 걷는다. 그리고 어느 가게로 들어간다.

조립식의 기둥과 서까래, 기와가 얹어진 주택이다. 왁스 발린 마루를 딛고, 종이가 발린 미서기 창을 열면 다다미가 깔린 너른 방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동수 씨가 먼저 인사했다. 관장은 그곳에서 검은 벨트를 찬 채 서있었다. 벨트에 양 손을 얹은 채.

"반갑습니다."

관장이 화답했다. 동수 씨는 고개를 떨궜다.

"등록을 좀 하려고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관장은 빈 서판 위에 두루마리를 올려놓고 만년필로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동수요."

"동수 씨이시고… 등록은 언제부터?"

"지금부터요."

"지금부터요?"

"네. 제가 좀 당한 게 많아서요."

동수 씨는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자 눈 앞에는 가훈처럼 걸린 명판이 뵌다.

명판에는 무언가 쓰여있었다. 한지 위에, 페인트 브러쉬로.

[ P A Y B A C K D O J O ]

"좋습니다. 그러면… 마침 잘 됐군요. 마지막 한 자리가 남았는데, 바로 신청 가능하십니다."

"잘 됐군요."

"그러면 그렇게 하시고… 도복은…"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으시다고요?"

"예."

동수 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동수 씨, 잘 아실거라 생각했는데… 의복은 생각보다 중요합니다. 마음가짐의 기본이에요. 적절한 의복을 입음으로써 스스로 결의를 다질 수 있으니까요."

"예에…"

관장은 설교하는 목사처럼 얘기했다. 동수 씨는 마지못해 수긍했다.

"동수 씨도 환불을 받고 싶어서 오신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렇다면 단호해야지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단호해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 그런가요?"

"물론이지요."

관장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알겠습니다… 그러면, 저어… 카드로."

"현금으로 하시는 게 나을텐데요?"

관장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동수 씨는 갑자기 땀을 흘렸다.

"네, 에? 웨… 에, 왜요?"

"10% 할인이 있거든요. 계좌 이체 하셔도 됩니다."

동수 씨는 주머니를 뒤적였다. 그러나 손에 잡히는 것은 털 뿐이었다.

"저어, 지갑을 잃어버려서…"

"…"

관장은 다시 은은한 미소를 보이면서, 코팅된 A4 종이를 가져왔다. 거기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 새마을금고 486-1010235-0242 연인사 ]

"음… 저, 그런데 전화기도 잃어버렸는데요."

"이렇게 하시죠. 자, 이게 당신 것 아닙니까?"

관장은 이번에는 해맑게 웃으면서 검은 폴리카보네이트제 네모 상자를 꺼냈다.

"에? 그, 그걸 어떻게."

"열어보세요."

동수 씨는 손을 떨면서 네모 상자를 엄지로 슥 문질렀다. 떠오르는 화면은 과연 동수 씨가 익히 보던 것이었다.

"자, 이제 된 것 아닙니까?"

관장은 이를 보이고 웃었다. 귀에 걸릴 것만 같았다.

"…미안해요. 아니, 감사합니다."

"아니, 저, 죄송하지만, 아니, 감사하지만, 다음에 오겠습니다."

동수 씨는 어깨를 움츠리고 뒤로 돌아 종종걸음을 걸었다.

동수 씨가 미서기 창을 반쯤 열었을 때, 뒤에서 일갈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어딜 도망치시는 겁니까!"

관장은 우렁차게 호통쳤다. 불호령이 떨어지자, 그 목소리는 도장 전체를 에워쌌다.

동수 씨는 돌아선 채 움찔거렸다. 얼어붙었다. 굳어있다. 아무 것도 못 했다. 차가운 오이가 엉덩이에 닿은 듯한 느낌이었다. 관장은 어느새 동수 씨의 뒤로 다가왔다. 아무 소리도 없이.

"자아, 저와 함께 하시는겁니다. 동수 씨. 세계는 당신 거에요. 당신은 손만 뻗으면 됩니다."

관장은 동수 씨의 어깨를 붙잡고, 동수 씨의 뒷목에 입김을 불듯 속삭였다. 동수 씨는 목 뒤의 털이 간지럽혀지는 감각에 더욱 움찔거렸다.

"그, 그만…!"

"동수 씨에게는 재능이 있어요. 지금 보여주시는 단호함, 좋아요. 아주 좋아요. 하지만 약간의 터치가 필요합니다."

"동수 씨는 또 다 잃고나서야 깨달을 셈입니까?"

동수 씨는 그 말을 듣고 마샤를 떠올렸다. 위스콘신으로 돌아가버린 그녀를. 그리고 대치동에 홀로 남겨진 자신을 생각했다. 다다미 넉 장 반짜리 고시원에서 살고 있는 자신을.

"…좋아요. 하겠습니다. 바로 이체해드리겠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끝마친 동수 씨는 곧바로 네모 상자를 꺼내어 양 엄지를 이용해 능숙하게 화면을 두드렸다. 관장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금액은…"

"오십 칠만 팔천 이백원 되시겠습니다."

"…"

동수 씨는 자신이 입고 있는 점프수트를 내려다보았다. 이 털달린 수트를 사는 데에도 자그마치 백 일만 이백 삼십 오원이 들었다. 거기에 더해서 오십 칠만 팔천 이백원을 더하면… 동수 씨는 계산기를 꺼내려다가 뒤늦게 점프수트에 주머니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건 당신 인생입니다, 동수 씨. 그리고 당신 인생은 당신이 주도적으로 사는거에요."

관장은 천연덕스럽게 입바른 소리를 해댔다. 동수 씨는 반박하지 못했다.

"흠, 그리고 아울러서… 부가… 음? 어쩌구저쩌구… 어디서… 뭔가 새는… 아무튼, 그건 별론으로 하지요."

관장이 의미 모를 소리를 했지만, 동수 씨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지금 동수 씨의 머리 속에는 그 날이 떠올랐다. 마샤가 떠날 때도 그랬다. 그녀가 위스콘신으로 돌아가 학교를 다시 다니겠다고 했을 때, 동수 씨는 아무 것도 하지 못 했다. 하다못해 그녀가 마도공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기는 하냐고 질문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는 그대로 항구에서 쓸쓸한 작별을 맞이했다. 소쩍새가 울었지만,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에 묻혀 지나갔다. 해안 만의 포말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바다의 파문에 꺼져가며.

"…알겠습니다. 이체해드릴게요."

동수 씨는 확인 단추를 눌렀다. 약간의 결심이 필요했지만, 일단 결심이 들자 행동에 옮기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보냈습니다. 확인해주세요."

동수 씨는 결연하게 말했다.

"…어디보자, 음?"

관장은 그것을 보더니 갑자기 의문을 표했다.

"왜요? 뭐 문제 있나요?"

"아니, 동수 씨. 부가세를 안 주시면 어떡해요."

"네? 그게 무슨…"

"제가 부가세 별도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관장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동수 씨는 몸을 비틀거렸다.

"뭐요?"

비틀거리고, 비틀고.

"야…"

파닥거리고, 움찔거렸다.

"야…"

안면근육이 경련하고, 이마의 핏줄이 꿈틀거리고.

"이…"

관자놀이가 조여오고, 눈앞이 새하얘지고…

"개

!

!"

그리고는 외마디 선언을…

그러자 남은 것은 관장의 흐뭇한 얼굴이었다.

"바로 그거에요! 첫날부터 정말 장족의 발전이로군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들썩이며 씩씩거리는 동수 씨의 뒤로 관장이 아무도 모르게 다가왔다. 관장은 어깨를 주무른다. 약간은 능청스럽게.

동수 씨의 표정은 조금 누그러진다. 그렇지만 어딘가 그랬다. 요상하게 찜찜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은 서서히 진정되어가지만, 그 사그러드는 고양감 속에서 동수 씨는 길을 헤맸다.

그래도 동수 씨의 눈썹은 축 쳐져있었다. 아직도 그를 떠난 마샤를 떠올리면서. 여전히.

References